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문단 편집) === 격추 === 1983년 9월 1일 0시 5분 무렵 007편은 [[소련]] 영토인 [[캄차카 반도]] 북동쪽 상공에 진입하였는데 이때 소련 [[방공군]]은 007편의 진입을 눈치챘고 [[미합중국 공군]]의 군용기라고 판단하였다. 오전 1시 30분에 007편은 소련의 영공에 진입하였지만 대응하기엔 007편이 캄차카 상공에 체공할 시간이 많지 않아 캄차카 반도에 배치되었던 소련 방공군 편대는 요격을 시도하지 않고 귀환했고 007편은 오전 2시 28분에 소련 영공을 통과하고 소련의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이때 007편이 빠져나간 [[오호츠크해]]는 소련 영토로 둘러싸여 있긴 하지만 엄연히 공해로 소련의 주권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소련은 이곳 상공의 기체를 요격할 권한이 없다.] 하지만 오전 2시 36분에 대한항공 007편이 [[오호츠크해]]를 지나 다시 소련 영토인 [[사할린]] 섬 상공에 접근하였고 이때 [[소련군]]은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이 때부터 대한항공 007편의 조종석 녹음 장치의 기록이 남아 있다. 조종사들은 잡담 중이었다.] 오전 3시 5분에 007편은 뒤따라오던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로스앤젤레스발]] 대한항공 015편[* 3년 전에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 015편 착륙 사고]]를 냈던 비행기와 동일 편명이다.]과 교신했고 서로 바람 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소련 영공을 피해서 날고 있었으므로 그랬던 것이지만 007편 조종사는 비행계획서를 체크하고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곧이어 오전 3시 8분에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오시포비치(Геннадий Николаевич Осипович, 1944–2015)가 탑승한 [[사할린]]의 소련 방공군 소속 [[Su-15]]TM [[요격기]]가 007편을 확인했다. 새벽 시간이라 아주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고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아예 형체만 보였던 것은 아니고 후일 오시포비치의 인터뷰에 따르면 꼬리의 민항기 마크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007편 격추과정에는 불운한 우연도 겹쳤다. 오시포비치의 Su-15가 00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었던 데다 오시포비치가 탑승한 Su-15의 탄띠에 때마침 [[예광탄]]이 없어서 007편에서는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KAL007: Korean Air 007 climb and maintain FL350 leaving FL330 at this time. 도쿄관제소: Tokyo Control Roger.||007편: FL330에서 FL350으로 상승한뒤 유지하겠습니다. 대한항공 007편. 도쿄관제소: 도쿄컨트롤, 알겠습니다.|| 위 무전을 007편과 도쿄관제소가 나눴을 때 오시포비치의 Su-15는 007편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 도쿄와 무전을 마친 007편이 '''고도를 35,000ft(10668m)로 올리기 시작했다.'''[* 위 CVR 영상의 28초 부분] 기수를 들면서 속도가 조금 떨어졌기 때문에 오시포비치의 Su-15는 007편을 앞질러가게 되었다. 이렇게 경고사격 이후에 고도를 올린 것은 경고사격을 알아차리고 반응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Su-15|Su-15TM]]의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는 007편이 자신을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적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고도를 높이며 속도를 줄이는 것이 공격적 행동이 되는 이유는 첫 번째로 [[데드식스|대다수의 전투기의 무장은 전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뒤에 있는 비행기가 항상 유리하다.]] 그리고 서로 속도가 동일한 상황에서 앞에 있는 기체가 기수를 들어올리는 등의 방식으로 속도를 빠르게 줄이면 뒤에 있는 비행기가 앞 기체를 오버슛하여 앞지르게 되는데 이러면 역으로 뒤를 잡히게 되는 것이므로 공군 조종사 입장에서는 자신을 따돌리려는 리버설, 즉 [[포스트스톨 기동|공수를 바꾸는 기동]]인 것이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두 번째로 전투기나 요격기는 그렇게 느려진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날기 어렵다. 전투기는 민항기에 비해 익면적도 작고 중, 고속 기동성을 중시하거나 아예 속도에 몰빵하는 설계라 민항기보다 실속속도가 훨씬 빠르다. 즉, 요격기의 조종사에게 이 행동은 전투기의 실속을 유도하는 지능적인 행동으로 비춰졌고 따라서 해당 항공기는 민항기 마크는 위장용으로 그려진 것이고 전투기의 특성을 꿰고 있는 군 관계자가 탑승한 모종의 군용기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우연이 없었다고 해도 007편이 오시포비치의 Su-15를 무시('''실제로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지만''')하고 도주를 계속하는 이상 격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극동지방 소련 방공망의 대응이 그다지 신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시포비치의 Su-15가 007편과 조우한 것은 이미 007편이 소련군 기지 주변을 지나서 공해로 빠져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격추시키지 않으면 눈 뜨고 그대로 놓치는 수밖에 없는 데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당시 [[보잉 707]]을 개조한 [[미합중국 공군]]의 전자[[정찰기]]인 [[RC-135]][* 정확히는 실험기인 보잉 367-80에서 C-135와 707로 가지가 나뉜 것이다.]가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 말았다 하면서 약올리는 비행 방식[* 이러한 방식으로 영공 근처를 지나가거나 살짝 침범하는 도발은 현재도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 자주 행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도발하면 정찰기에 집중되는 레이더 전파의 주파수와 패턴을 수집(ELINT)할 수 있고 상대국 방공망의 대응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한국 방공식별구역을 통보없이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이런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에 소련 방공군이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잔뜩 벼르고 있던 것도 한 몫했다. 이런 점 때문에 5년 전 일어난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과 너무 유사해서 [[음모론]]이 힘을 얻었고 지금도 이 사건을 다룬 외국어 [[위키백과]]의 문서들에는 902편 격추 사건 때문에 대한항공이 미국의 비밀 작전에 동원되었고 소련은 낚인 것 아니냐는 음모론성 서술이 있다. 007편의 속도가 줄어들면서 고도를 상승하며 오버슛을 하게 되자 명백하게 자신을 따돌리려고 한다고 생각한 오시포비치는 다시 007편의 주위를 빙 돌아 007편의 8km 뒤편으로 날아가 오전 3시 25분 무렵에 [[https://en.wikipedia.org/wiki/K-8_(missile)|R-98]] 공대공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다. || [[파일:kal007_hit.jpg|width=100%]] || 미사일 한 발은 다른 곳으로 날아갔지만 나머지 한 발이 기체 후방부에서 [[근접신관|근접폭발]]했다. 007편은 R-98에 피격된 여파로 기체 후부에 구멍이 뚫리면서 급격한 감압이 일어났고 이 충격으로 최소 1개 이상의 유압장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B747에 장착된 4개의 유압 시스템 중 승강타를 조작할 때 쓰이는 3번 유압은 비상 강하를 하던 007편이 다시 상승하지 못한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피격 직후 007편은 잠시 38,000ft(11582m)까지 급상승하였고 이후 약 11분간 추락하며 활공하다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이때 10여 분이나 남아 있었는데도 007편이 비상상황임을 알리고 MAYDAY를 하지 않았는지는 미스터리다.[* 피격 직후 급격한 기내 감압으로 인해 저고도로 하강하겠다는 교신을 도쿄 컨트롤에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무전은 잡음이 심해 도쿄 컨트롤에서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관제사는 주파수를 확인한 뒤 다시 교신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007편과의 교신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조종사들은 피격 직후 상승하던 불안정한 기체를 제어하기 위해 [[랜딩 기어]]를 내리는 시도도 했지만[* 이때 엔진은 정상이라고 하는 녹음이 들린다.] 자동조종은 물론 정상적인 수동조종도 어려움을 느끼고 비상강하를 시작한다. 007편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처럼 꼬리부분이 손상[* 미사일 폭발의 여파로 추락 과정에서 공중분해됐을 가능성도 있다.]되어 유압을 상실한 채로 주변을 강하하며 비행하다가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ICAO 최종조사 보고서에서는 승객들이 추락 직전까지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으며 오시포비치는 [[사할린#s-3|모네론 섬]] 근처에서 007편이 나선선회를 하면서 추락하는 것을 확인하고 기지로 복귀했다. 007편이 최후의 순간 동안 급강하한 데다 바다는 땅에 비해 충격을 반사하므로 수면을 강타한 직후 생존자가 있었을 확률은 없다. 추락 직후로 추정되는 시점에 일본의 [[오징어]]잡이 [[어선]] 58치시마호가 폭발을 목격했다고 한다. 한편 007편과 무전이 되지 않자 015편과 도쿄관제소는 다급하게 007편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심지어 도쿄 관제소는 사할린에 있는 소련의 민간 항공관제소에도 연락을 했지만 007편이 마지막으로 보고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후 소련이 격추 사실을 시인하였고 부랴부랴 [[미합중국 해군]]과 [[미합중국 해안경비대|해안경비대]], [[해상자위대]], 그리고 민간 트롤어선까지 동원해 공해상에서 구조와 수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소련 해군]]과 해안경비대가 미일 구조대가 소련 영해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유력 추락 지점인 모네론 섬 근해는 수색하지도 못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ttachment/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KAL007_3.jpg|width=1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kal007_debris.jpg|width=100%]]}}}|| || 당시 소련 측에서 회수한 유류품들 || 회수된 007편의 수직꼬리날개 잔해[* 꼬리날개에 있는 기체 등록번호 HL7442의 HL7 부분이다.] || 이후 사고 현장과 인접한 일본 [[홋카이도]] 근해에서 일부 유류품과 13명분의 시체 일부분을 찾았다. 한편 007편이 추락한 직후 소련은 모네론 섬 근해를 수색했는데 원래는 [[RC-135]]의 잔해와 블랙박스, 컴퓨터 그리고 영공침범의 증거로 미군의 시신을 인양하러 간 것이지만 자신들이 격추한 것이 RC-135가 아니고 그냥 [[대한항공|민간인이 탄 어느 동아시아의 민간 항공사]]의 [[보잉 747|민항기]]였다는 것을 뒤늦게 안 뒤 경악했다. 이때 007편의 파편과 블랙박스, 유류품이 수거되었다. 원래 소련은 자기들이 민항기를 격추했다는 사실을 은폐할 생각이었으나 미국의 정보 공개로 무산되었고 미국과 일본의 압박 때문에 1983년 9월 26일 소련은 유류품 213점을 전달했다. 그러나 블랙박스와 잔해들은 [[냉전]]이 끝날 때까지 극비리에 관리되었으며 소련은 007편 블랙박스의 존재를 부인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이 흐른 후에 [[1988 서울 올림픽]]에 소련이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의 올림픽 참여로 [[한소관계]]가 크게 개선되자 [[노태우 정부]]는 한소수교를 추진하면서 더 이상 007편 격추 사건을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한소정상회담 전날인 1990년 6월 3일 대한민국 정부는 "한소관계의 개선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보장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불행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한소관계의 개선 노력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혔고 이 사건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이전에 일어났음을 지적하면서 "이번 한소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로 소련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건설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래도 1990년 한소수교 당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비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하였고 1991년 한 차례의 추가 수색을 벌여서 007편의 잔해와 유류품 일부분을 더 찾아냈다. [[소련 붕괴]] 이후인 1992년에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고 국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접 블랙박스와 일부 유류품을 반환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된 후 1990년대 중후반 러시아가 극심한 경제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많은 귀금속, 유류품들이 러시아 내에서 도난당하거나 군 관계자들이 서방세계에 몰래 팔아치우면서[* 이때는 전직 대통령인 고르바초프가 연금 액수를 달러화로 환산하니 불과 몇십센트였다고 개탄하고 이후에도 각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임금체불이 일상화되어 몇 달씩 월급이 밀리거나 받는다고 해도 핫도그, 브래지어, 벽돌, 면도기 같은 물건 따위를 월급이라며 받고 학교에서도 월급 줄 돈이 없다며 보드카를 월급이라며 내주던 시절이었으며 체르노빌 메달도 미화로 몇달러, 몇십달러 헐값에 내다 팔렸다. 이러니 유류품이 성할 리가 없었다.] 그 뒤에도 희생자들의 귀금속 유품이 해외 인터넷 쇼핑몰에서 팔리는 문제가 남아 있다. 반면 사고 현장과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인 홋카이도 [[왓카나이시]]에서 수거된 유류품 371점은 시 당국이 한동안 보존했다가 참사 20주기를 맞은 2003년에 유족들의 동의 하에 해변에서 [[https://m.yna.co.kr/view/AKR20030902000800009?section=/index|소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